산업화 이면에 숨겨진 수탈과 강제동원의 흔적들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시기였다.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뒤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강탈해 갔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 이후 본격적인 강제동원 정책이 실시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군인·군무원·노무자·위안부 등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겨진 건축물과 시설들은 겉으로는 근대 산업화의 흔적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조선인들의 땀과 눈물, 고통이 서려 있다.
전북 군산, 전남 목포, 울산 지역에는 당시 강제동원과 수탈의 현장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장소들은 단순한 산업유산이나 근대 건축물이 아니라, 후세에게 역사의 진실을 전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소중한 역사 현장이다. 현재 이들 지역의 관련 시설들은 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활용되어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제공하고 있다.

군산, 호남평야 쌀 수탈의 관문이자 저항정신의 발원지
군산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핵심 거점이었다. 1899년 개항한 군산항을 통해 막대한 양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조선 농민들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렸다. 지금도 군산항 일대에는 당시 수탈 경제의 핵심 시설들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1908년 대한제국 시기에 건립된 구 군산세관 본관은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벽돌로 지어진 유럽 양식의 건물로,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서양 고전주의 건축물로 꼽힌다.
이곳에서 일제는 쌀과 곡식을 아주 싼 값에 대량으로 수탈해 갔으며, 이는 조선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현재는 호남관세박물관으로 활용되어 당시의 수탈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923년 설립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군산에 세워진 최초의 은행으로, 고리대금업을 통해 조선 농민들의 토지와 쌀을 수탈하는 핵심 기관이었다. 조선은행은 일본인들이 대규모 토지를 매입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으며, 그 결과 호남평야 일대의 광활한 농토가 일본인 대지주들의 손에 넘어갔다.
이 건물은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현재는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군산은 단순히 수탈의 현장만이 아니었다.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나흘 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이 바로 군산이었다.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사와 기독교 신자들이 주도한 이 만세 시위는 전라도 지역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현재 군산 3·1 운동 100주년 기념관과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이 이러한 저항정신을 기리고 있다.
목포, 남해안 수탈의 전진기지에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목포 역시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수탈 항구였다. 1897년 10월 개항한 목포항을 통해 일본은 남해안과 호남 지역의 쌀과 수산물을 대거 반출했다. 목포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은 당시 식민 지배와 경제 수탈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00년 건립된 구 목포 일본영사관은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일본이 세운 영사관으로, 유달산 기슭의 경사지에 일본식 축댓돌 쌓기로 대지를 조성하여 건축되었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2층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로, 건물 내부에는 8개의 벽난로가 있으며 특히 2층 중앙의 벽난로는 건립 당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905년 이후에는 목포이사청, 1910년부터는 목포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은 조선 농민 수탈의 핵심 기관이었다. 동양척식회사는 1908년 설립된 일제의 식민정책 선봉기관으로, 조선인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목포지점은 전라남도 일대의 광활한 농토를 장악하며 체계적인 토지 수탈을 자행했다. 현재 이 건물은 목포근대역사관 2관으로 사용되어 일제의 침략사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목포항을 통해 반출된 쌀과 수산물은 일본의 군수 물자로 전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항만 건설과 창고 운영에 강제 동원되었다.
목포 근대역사관에 전시된 당시 사진 자료들은 식민지 수탈의 참상과 함께 이에 맞선 조선인들의 저항 의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목포는 이처럼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산시키는 교육의 현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울산, 군수 공업도시 건설과 대규모 강제동원의 현장
울산은 현재 대한민국 조선업과 석유화학공업의 메카로 알려져 있지만, 그 뿌리에는 일제강점기 군수 공업 개발과 대규모 강제동원의 아픈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울산을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핵심 병참 기지로 개발했다.
일제강점기 울산은 일제의 군수물자 수송의 최적지로 이용되었다. 1920년대부터 울산에는 방어진을 중심으로 대규모 일본인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1940년대에는 일본인만 500여 가구가 거주할 정도였다.
방어진 지역에는 일본 지명을 그대로 딴 '히나세골목'이 형성되었고, 우체국, 전당포, 금융조합, 일본수산 출장소, 여객터미널, 영화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동해안 최대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울산비행장은 군사비행장으로 개조되어 일본 본토와 대륙을 오가는 군수물자 운반과 연료 공급 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비행장 건설과 운영에 강제 동원되었으며, 각종 군수공장과 탄광에서도 청소년과 여성까지 포함된 대규모 강제 노역이 자행되었다.
울산 병영동 일대에는 당시 일본인 관리들과 군인들이 거주했던 가옥들이 일부 남아 있어 식민 지배 세력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또한 울산 각지에 산재한 근대 산업시설들 역시 조선인 강제동원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현재 울산시는 이러한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올바르게 보존하고 교육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여는 교육의 현장
군산, 목포, 울산에 남아 있는 강제동원 관련 시설들은 현재 모두 역사 교육의 중요한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 목포근대역사관 등에서는 단순히 건축물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강제동원과 수탈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교육하고 있다.
특히 이들 박물관과 역사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참상을 알리는 동시에 이에 맞선 조선인들의 저항 정신도 함께 조명하고 있다. 3·1 운동을 비롯한 각종 독립운동 자료들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증언, 관련 문헌들이 체계적으로 수집·전시되어 관람객들에게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제공한다.
이러한 역사 현장들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 세대에게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강제동원과 수탈의 현장에서 이제는 화해와 상생,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 현장을 통해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방문 안내
- 군산: 군산근대역사박물관(https://museum.gunsan.go.kr/new/contents/userInfo101.jsp), 옛 군산세관, 구 제일은행, 미곡창고 / (주소: 전북 군산시 해망로 일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 목포: 목포근대역사관(https://www.much.go.kr/cooperation/net/mok.do),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구 일본영사관 / (주소: 전남 목포시 영산로 일대, 목포문화재단)
- 울산: 울산병영성, 구 일본인 가옥, 울산항 일대 / (주소: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로 일대, 울산광역시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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