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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터/역사와 기억의 터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 – 해방 후 비극과 이념 갈등의 상처

by Storyteller Joo 2025. 10. 3.

 

평화로운 섬에 드리워진 분단의 그림자

 

푸른 바다와 웅장한 한라산, 아름다운 오름들로 둘러싸인 제주도는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관광의 섬이자 평화의 상징이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이 아름다운 섬은 독특한 문화와 따뜻한 인심으로 국내외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도에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 뒤에 찾아온 분단의 현실은 한반도 전체를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미·소 냉전 체제 속에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제주도와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은 해방 공간의 가장 큰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은 단순한 지역적 사건이 아니라 분단과 냉전, 그리고 이념 대립이 빚어낸 우리 현대사의 깊은 상처였다.

 

 

제주도 아름다운 섬에 일어났던 가슴 아픈 역사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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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7년 7개월간 이어진 섬 전체의 비극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었다.

이후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 직장인 약 4만여 명이 참여한 총파업이 벌어졌고, 이는 제주도 내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가 동참하는 대규모 항의로 확산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육지에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가 제주도로 파견되어 강압적인 수사와 검속을 자행했고, 이는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며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소를 일제히 공격했으며, 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 단독선거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문제는 무장대와 토벌대의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1948년 10월부터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 지역 100여 곳의 마을이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해안마을로 강제 소개되었다. 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25,000~30,0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8분의 1에서 최대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여순사건, 동족상잔을 거부한 군인들의 봉기와 비극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 연대에서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되었다.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받은 14 연대 소속 군인들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라며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하사관들은 병사위원회를 열어 토론한 끝에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으로 이동해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장악했다.

 

반란군은 여수에서 인민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인민대회를 개최하며 초보적이나마 행정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즉각 '공산주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진압 작전에 나섰다.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송호성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22일에는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군의 지원 하에 5개 연대 10개 대대와 경비행기, 해안경비대까지 동원된 대규모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완전히 탈환하면서 14 연대 주력은 지리산과 백운산 등으로 입산해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정부 측 진압군에 의해 2,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하는 등 총 2,000~5,0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국가보안법 제정과 반공체제의 구축

 

두 사건은 이승만 정부의 권력 강화와 반공체제 구축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내란행위 자체보다 반국가적 정당·단체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 결사나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을 핵심으로 했으며, 행위 이전 단계를 처벌하는 예방법적 성격을 띠었다.

 

또한 군 내부의 좌파 세력을 색출하는 '숙군작업'이 강화되어 약 5%의 장병들이 군을 떠났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확산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해야 한다"는 강경한 담화를 발표하며 철권통치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사건 이후 희생자와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피해사실을 드러내지 못했으며,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활동을 제약받았다. 이러한 고통은 수십 년간 지속되어 한국 사회의 깊은 상처가 되었다.

 

진실 규명과 화해를 향한 긴 여정

 

두 사건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지만,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진실 규명 노력이 시작되었다. 2000년 1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졌고,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을 인정하며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여순사건 역시 2022년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본격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제주 4·3 평화공원과 기념관, 여순사건 관련 추모시설 등이 조성되어 역사 교육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 비극적 사건들을 단순히 과거로 묻어두지 않고, 분단과 이념 갈등이 얼마나 큰 고통을 낳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평화롭고 아름다운 제주도의 모습은 그 시절 희생된 분들의 고통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평화와 화해,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진정한 교훈이 될 것이다.

 

방문 안내

  • 제주 4·3 평화공원
    • 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산 59-3
    • 운영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 제주 4·3 평화재단 공식 사이트 (https://jeju43peace.or.kr/)
  • 여순사건 기념공원·역사관
    •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학동 141-1 (여수 이순신공원 인근, 순천에는 순천사건 기념관 예정)
    • 운영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