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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터/역사와 기억의 터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동양 평화를 꿈꾼 의거의 정신

by Storyteller Joo 2025. 9. 30.

민족의 등불, 동양평화를 향한 큰 뜻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단순히 일제에 맞선 용기 있는 의사로 기억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깊고 넓은 사상가였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대지주 양반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난 안중근은 전통적인 한학 교육과 서구 근대 사상을 함께 수용하며 성장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천주교를 신앙하게 된 그분은 인간의 도리와 사회 정의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의협심과 정의감을 키웠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이 사건은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의 의거는 개인적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숭고한 행위였음을 재판 과정에서도 끝까지 역설했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사상과 정신은 단순한 항일투쟁을 넘어 동양 삼국의 평화와 번영을 꿈꾸는 원대한 비전이었다.

 

하얼빈 의거가 품은 진정한 의미

 

하얼빈에서 일어난 의거는 단순한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에 맞선 국제적 선언이었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핵심 동기는 한·중·일 동양 3국의 평화에 있었다.

 

이토는 러일전쟁에서 '동양평화 유지'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하고 한국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한 정책을 추진한 인물이었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조차지역이었고, 안중근은 대한제국 국민이었다. 정상적인 국제법 절차라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안중근 의사도 그곳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동양평화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일제의 불법 재판으로 무산되었다.

 

재판 과정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의연하게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안 의사의 유묵 '일한교의 선작소개(日韓交誼善作紹介·일한 친선은 서로를 잘 아는 데서 생긴다)'처럼 일본을 배려하는 포용성을 보여줬다.

 

이는 그분이 좁은 민족주의를 넘어선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음을 증명한다. 비록 그분의 목숨은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후대 민족운동의 등불로 빛나고 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동양 평화를 꿈꾼 의거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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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기념관에 살아 숨 쉬는 역사정신

 

서울 남산 중턱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70년에 개관하였고, 2010년 새로운 모습으로 재개관되었다. 기념관이 들어선 자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신사 터였다. 강제 신사참배를 종용받던 굴욕의 땅에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모시게 된 깊은 상징성을 담고 있다.

 

12개의 반투명 유리 기둥을 묶은 독특한 건물은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1909년 안중근 의사와 함께 무명지를 끊고 조국 광복을 맹세한 12명의 동지들을 기리는 것으로, 일제에 맞선 투쟁 의지를 혈서로 맹세한 상징적 행위였다.

 

전시실에는 하얼빈 의거 관련 자료, 재판 기록, 친필 휘호와 유품,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동양평화론』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관람객이 세 개 층이 열린 아트리움에서 안중근의 동상과 마주하게 되는 감동적인 동선으로 설계되었다.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내부 공간을 가득 채우도록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방문객들은 전시를 통해 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넘어, 그분이 꿈꾸었던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 기념관은 학생과 시민들에게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자, 정의와 평화를 구현해 나가는 방법을 성찰하게 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동양평화론』에 담긴 평화의 철학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집필하기 시작한 『동양평화론』은 그분의 사상적 깊이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원래 집필 계획은 ① 서(序) ② 전감(前鑑) ③ 현상 ④ 복선(伏線) ⑤ 문답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일제가 약속을 배반하고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해 서론과 전감 부분만 완성되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한국·청·일본을 회원국으로 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여 동양 삼국이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자는 '동북아연합' 구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뤼순을 중립지대로 하여 삼국 협력 기구를 설치하고, 삼국 연합군을 창설하여 서양 열강의 침입에 공동으로 맞서며, 로마 교황의 중재 아래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자는 혁신적 내용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현재의 유럽연합(EU)과 놀랍도록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을 통해 제시한 내용들은 UN이나 EU, NATO 같은 국제기구가 탄생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구상된 선구적 사상이었다.

 

국제기구를 통한 다국적 협력, 경제통합, 집단안보 개념을 100년 전에 이미 체계적으로 정립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더욱 돋보인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사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한다. 그분은 사형 직전 일본인 변호사의 수첩에 '곡돌사신무견택(曲突徙薪無見澤·곡돌에 섶을 제거한 이는 혜택을 바라지 않는데)/초두난액위상객(焦頭爛額爲上客·머리를 태우며 이마가 짓무른 이가 상객이 되는구나)/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네)/위일비 위한(爲日非爲韓·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네)'라는 친필 4행시를 남겼다.

 

이는 자신이 이토를 저격한 것이 큰 재앙을 미리 내다보고 화근을 없앤 선각자적 위업으로, 일본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안중근이 "나는 한국을 위하여 나아가 세계를 위하여 이토를 죽인 것"이라 했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하게 되고 평화로워져서 오대주에 시범이 될 것을 희망했다"라고 했듯이, 그의 동양평화는 세계평화로 외연이 확대된다. 현재도 일본의 안중근연구회 소속 200여 명의 일본인들이 매년 안 의사 서거 기념일에 참석하여 추모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념관을 찾는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다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세계가 여전히 분쟁과 갈등 속에 놓여 있는 오늘, 안중근 의사가 보여준 평화에 대한 염원과 정의에 대한 신념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분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와 함께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방문 안내

  •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91 (남산 자락, 국립극장 맞은편)
  • 운영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 (입장 마감 17:30)
  •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당일
  • 입장료: 무료
  • 공식 사이트: 안중근의사기념관(https://www.ahnjunggeun.or.kr/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