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골목길마다 피어오르는 김이 이제는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분식집 앞에서 줄을 서는 사람들, 겨울밤 손난로 같은 호떡을 기다리는 외국인 관광객들, 시장 통로를 메운 어묵 국물의 향에 이끌려 온 세계 각국의 미식가들.
한때 서민의 허기를 달래던 소박한 길거리 음식이 이제는 한류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올랐다. 2024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1,637만 명이 가장 만족한 활동 1위가 바로 '식도락 관광'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길거리 음식은 더 이상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가장 친근하고 맛있는 입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후 혼란기에서 시작된 서민의 위안
한국 길거리 음식의 본격적인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시작된다. 1950년대 전후 혼란기, 피난민들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에게 값싸고 배부른 길거리 음식은 그야말로 생존의 수단이었다.
특히 부산을 중심으로 어묵 산업이 급성장했다. 1953년 일본에서 어묵 제조 기술을 배워온 박재덕 씨가 영도 봉래시장에 설립한 삼진어묵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묵 공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되자 어묵 생산은 호황을 맞았고, 1950~1960년대에는 미도, 환공, 삼진, 동광, 대원, 영진 등의 어묵 제조 공장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1960년대는 정부의 '혼분식 장려 운동'이 시행되던 시기였다. 보리 30%와 쌀 70%를 혼합한 보리밥을 권장하고, '분식의 날'을 정해 밀가루 음식을 먹도록 했다. 이런 정책적 배경 속에서 떡볶이, 순대, 어묵, 군고구마 같은 길거리 음식들이 서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시장 구석 좌판에서 시작된 이 소박한 간식들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며, 현재는 명동, 부산 자갈치 시장, 대구 서문시장 같은 곳에서 외국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관광 명소로 변모했다.

'K-스트리트푸드'로 세계를 정복한 대표 메뉴들
떡볶이는 매콤 달콤한 맛으로 'K-스트리트푸드'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쌀떡(쌀가루 조제품) 수출액이 2018년 약 2,452만 달러에서 2022년 6,407만 달러로 폭증했다.
2023년 미국 NBC는 "떡볶이의 장악!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미국 입맛을 사로잡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현지의 K-스트리트푸드 열풍을 조명하기도 했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떡볶이는 글로벌 현지 소비자의 선호도와 편의성을 고려해 컵과 파우치 형태의 상온 제품으로 출시했으며, 미국, 일본, 베트남, 중동까지 전략적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캣 데닝스가 SNS에 직접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 모습을 인증하고, 구독자 1,020만 명을 보유한 미국 유명 요리 유튜버 바비쉬의 떡볶이 레시피 영상이 279만 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인플루언서들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호떡은 뉴욕과 런던의 푸드트럭에서 겨울철 핫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달콤한 속과 바삭한 겉면의 조화가 서구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해외 한국 문화 축제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가 되었다.
한국식 핫도그 역시 2021년부터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미국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매우 높은 인기를 보이고 있으며,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2022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냉동식품 중 핫도그가 수출 규모 2위를 기록했다.
어묵 국물은 일본 어묵과 유사하지만, 고추기름과 파를 곁들인 한국식 어묵탕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특히 한국의 어묵은 다양한 형태와 맛으로 발전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부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어묵 문화는 이제 K-푸드의 한 축을 담당하며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SNS가 만든 길거리 음식의 새로운 전성기
오늘날 길거리 음식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치즈 폭발 핫도그', '불닭볶음면 토핑 떡볶이' 같은 퓨전 메뉴들의 영상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뷰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히 2024년 미국 유명 래퍼 카디비가 '까르보불닭볶음면'을 먹는 영상을 틱톡에 올려 큰 화제가 되었고, 삼양라운드스퀘어의 불닭시리즈 누적 판매량이 50억 개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K-콘텐츠와 SNS의 시너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에는 다채로운 색감의 길거리 음식 사진과 영상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빨간 떡볶이의 매콤한 색깔, 노릇노릇한 호떡의 황금빛,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의 정겨운 모습들이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런 콘텐츠들은 곧바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2024년 방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핫플레이스 1위가 명동(16.2%)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길거리 음식의 메카로 유명한 곳이다.
약과부터 간장게장까지, 확장되는 K-푸드의 영향력
2024년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예상 밖의 인기를 끈 음식이 있다. 바로 '약과'다. 할매니얼(할머니+밀레니얼) 트렌드에 힘입어 인기를 끈 약과가 방한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K-디저트'로 불리며 인기 메뉴로 자리 잡았다.
한국 전통 간식으로 다른 나라에서 쉽게 맛볼 수 없고 한국 고유의 문화가 담겨 있어 특히 대만 관광객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보이고 있다.
BC카드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간장게장이 2022년 인기 음식 순위 6위에서 2024년 3위로 급상승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불고기, 갈비, 김치 같은 전통적인 한식 대신 한국인이 일상에서 즐겨 먹는 음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K-드라마와 K-콘텐츠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실제 생활에 대한 호기심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길거리 음식 역시 이런 맥락에서 한국 대중문화를 체험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세계를 사로잡은 한국 맛의 미래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4년 10월까지 농식품 수출액이 82억 달러를 기록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특히 라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30% 증가한 10억 2,080만 달러를 기록했으며, 가공식품 전체 수출액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성과는 단순히 음식 자체의 맛뿐만 아니라 한류 콘텐츠와 함께 전해진 한국 문화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다. 길거리 음식이 K-팝과 K-드라마와 함께 K-푸드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K-스트리트푸드의 인기는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지속 가능한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각국의 현지 입맛에 맞춘 맞춤형 제품 개발, 할랄 인증을 통한 중동 시장 진출, 비건 트렌드에 맞춘 식물성 대체재 활용 등 다양한 전략이 추진되고 있다.
길거리 음식은 시대마다 얼굴을 바꿔왔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과거에는 서민의 허기를 달래주던 소중한 위안이었다면, 지금은 세계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맛있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음식이 만들어낸 이 놀라운 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K-푸드의 글로벌 확산에 더욱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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