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터/역사와 기억의 터16 경복궁 – 명성황후 시해와 국권 상실의 현장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와 함께 창건한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 만년토록 그대 큰 복을 누리리라'는 시경의 구절에서 따온 '경복'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아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한 경복궁은 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함께 한양 도시 계획의 중심축이었다. 처음 지어졌을 때는 390여 칸의 규모로 다른 나라 궁궐에 비해 검소했지만, 태조와 태종을 거쳐 세종 대에 이르러 집현전과 경회루, 간의대 등이 추가되며 조선 문화의 꽃을 피웠다. 특히 이곳에서 한글이 창제되고 반포되었으며, 조선의 정치와 문화, 외교가 이뤄지는 중심지였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 2025. 9. 26. 남한산성 – 병자호란의 치욕과 지켜낸 수도 방어선 누구나 한 번쯤은 역사의 길목에서 선택의 순간을 마주한다. 하지만 나라 전체의 운명이 걸린 선택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기 광주에 자리 잡은 남한산성은 바로 그런 무거운 선택의 현장이다. 조선의 도성과 불과 25km 남짓 떨어진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우리 역사상 가장 아픈 교훈을 새긴 장소가 되었다. 청나라 군대가 한양을 포위하자 인조와 대신들은 급히 이곳으로 몸을 피했고, 천혜의 요새는 한동안 수도 방어의 최후 보루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백성과 군사의 고통이 극대화된 공간이기도 했다. 47일간의 고립무원, 추위와 굶주림 속의 항전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고립된 채 청의 대군에 맞선 기간은 정확히 47일이었다. 1636년.. 2025. 9. 26. 행주산성 – 임진왜란을 막아낸 민족의 저력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덕양산 정상에 자리한 행주산성은 한국사에서 가장 극적인 역전승의 무대다. 해발 124m의 야트막한 산 위에 자리한 이 산성이 1593년 2월 12일, 동아시아 전역을 뒤흔든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꾼 결정적 현장이 되었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시대에 처음 축성되어 고려 시대까지 사용된 이곳은, 조선 시대에 대규모 개축을 거쳐 조선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역사적 무대가 되었다. 권율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다. 조선군은 의병과 승병을 포함해 약 2300명에 불과했지만,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7개 부대 3만여 명의 정예 병력이었다. 하지만 험준한 지형을 활용한 전략과 새로운 무기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를 지키려는 간절한 의지가 어우러져 .. 2025. 9. 25. 한국의 터, 평화를 사랑한 민족의 이야기 모든 국가는 저마다 고유한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개인의 삶이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을 드러내듯, 한 민족의 역사는 그들의 정신과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역시 자랑스러우면서도 때로는 아픈 기억들을 품고 있다. 이런 역사의 흔적들은 단순히 책 속 문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직접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생생한 공간 속에서 숨 쉬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15곳의 역사 유적지가 있으며, 2025년에는 반구천의 암각화가 새로 추가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의 역사 현장들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선조들의 삶과 투쟁, 꿈과 희망이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교과서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는 조선왕조 500년의 찬란한 문화를, .. 2025. 9. 25. 이전 1 2 3 다음